한국의 산에는 대부분 ‘깔딱 고개’라는 별칭이 붙여진 지점이 있습니다. 그 지점에 오면 숨이 차서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고비만 넘기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할 것입니다. 역시 정상을 정복해야 제 맛이 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는 못하겠는데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 사랑할 때,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감동하고 닫혔던 마음을 열게 됩니다.
한 책에서 시카고 빈민가의 보건소에서 일하는 남자 간호사가 이야기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의 싸움은 아주 작은 오해로 시작됩니다. 감정이 상하고 비꼬는 말이 오가고,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주먹이 오가고, 칼, 총, 결국 피 흘리고, 찢기고, 그 모든 것이 끝난 후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어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죄로 타락한 이후, 이 싸움은 계속 되어왔습니다. 끝없이 미워하고, 비방하고, 적대시하다 결국, 분쟁과 소송으로 끝을 냅니다. 이 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는 모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 달라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고, 요구하는 것보다 더 수고해주는 사랑을 보여줄 때, 이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때문에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뺨을 맞으셨고, 매를 맞으셨으며,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께서 이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러니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몇 마디 말씀에 강퍅했던 로마병사의 마음이 무너져 “진정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외쳤습니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어마어마한 주님의 사랑 앞에 무너졌는지 모릅니다. 저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린 것도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랑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감정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이 변덕스럽고 개인적인 감정에 기준을 둔 생각입니다. 성경은 다른 관점으로 사랑에 접근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서 오는 의지적인 태도와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으로 시작하면 이기적인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힘들고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해 내고 맙니다. 어떤 이는 “사랑의 감정이 일지 않는데 그것은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먼저 의도적으로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해 보십시오. 그러면 싫어하던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생기게 되고, 점점 자연스럽게 애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지적인 사랑을 스스로의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사랑할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음”으로 의지적인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의 정상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정상에 가야만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 길만이 세상을 축복할 유일한 길입니다.
(월간 코리안 뉴스 October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