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행복

젊은 시절에는 ‘배우자만 잘 만나면, 직장만 잘 구해 돈을 벌면, 만족을 얻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쉴 새없이 일을 해 목표를 성취했지만, 여전히 뭔가 빠져 있음을 느끼고 더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아, 결국 지치고 절망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돕고 섬기는 삶 속에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불쾌해 하고 지치고 맙니다.

   어떤 이는 더는 절망하지 않으려고 초연해지거나, 냉소주의자가 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나 동양의 종교는 그 어떤 것도 너무 많이 사랑하거나 바라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바라는 것에서 초연해 질수록 인생의 기쁨과 만족은 더 멀어집니다.

 

   그러면 피할 수 없어 보이는 이 고질적인 불만족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사실 세상이 줄 수 없는 뭔가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원하는 만족은 더 오래가야 하고 훨씬 깊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4세기경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인 어거스틴은 “불만족의 직접 원인은 사랑의 순서가 어긋난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일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가정보다 일을 더 사랑한다면, 가정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만족의 근본적 원인은 가장 중요한 대상인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에게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보장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자녀가 부모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 불변하는 존재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고, 무한한 사랑만이 무한한 기쁨에 대한 갈증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관점의 만족이고 행복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랑해온 것들을 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정이나 일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비해 하나님을 너무 적게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돈과 직업이 본연의 역할을 하고, 인간 관계도 질서를 찾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사랑은 주고 받아야만 배웁니다.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이해하고 그 실체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먼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게 되면, 우리도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분과 사랑을 주고 받으면,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월간 코리안 뉴스 December 2022)